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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불가 (IP: *.168.10.1)조회 수: 21312, 2009.05.17 00: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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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제사장의 죽음 (레위기 10:1, 2)
Ⅰ. 나답과 이비후가 범한 중죄는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아무리 대수롭지 않게 보이더라도, 중죄라고 불러야 한다. 그 죄는 처벌로 보아, 하늘의 심판주 하나님을 몹시 격노케 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 심판주는 사실대로 심판하신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뭐란 말인가? 여기에 기록된 그 전체는 그들이 여호와께서 말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로 분향했다는 것뿐이다(1절). 이것은 민수기 3장 4절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1. 저들이 이 때에 전혀 명령되지 아니한 분향을 드렸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전 날 저들의 위임식이 끝났고, 저들이 제사장들이므로 분향단에 분향을 하는 것은 저들이 맡은 직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위임식 날의 모든 예식은 아론 자신에 의해서 거행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론이 "제물을 죽였고" (9:8, 15, 18),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 시중만을 들었었기 때문이다(9:9, 12, 18).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만이 "회막으로 들어갔다" (9:23).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저들이 새로 서임받은 그 직책의 영예를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저들의 직무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부분을 즉시 실행해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저들이, 그 날에 있었던 예식은 특별하고 모세의 구체적 지시를 받아서 된 것이며, 아직도 그에게 물어 볼 것이 많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저들 자신들의 향로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저들은 자기들이 이제는 충분히 그 문 앞에서 기다렸었다고 생각했다-분향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들이 드린 것은 "다른 불" 이니, 명백히 금지되어 있던(출 30:9) "다른 향" 과 마찬가지이다. 아니, 모세가 분향을 위해 만든 향을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출 39:38). 그런데 저들은 모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분향을 드렸으므로 저들이 바쳐야 할 향이 아니라 전혀 다른 향을 드린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향의 연기는 "다른 불" 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분향하기를 진실로 원하셨다. 그러나 이 때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들의 범죄는 웃시야 왕의 범죄(대하 26:16)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서" (눅 1:9) 차례가 될 때에만 분향했었다. 그러나 이 때는 저들의 차례가 아니었다.
2. 저들이 명령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분향했다고 가정해 볼 때, 저들은 제물과 향을 태울 때 사용되는(계 8:5) 불, 곧 여호와의 불이 새로이 붙인 그 단의 불을 취하지 아니하고, 보통 불을 가져왔다. 아마 화목 제물을 삶을 때 쓰는 불에서 취했을 것이다. 그 불을 향 피우는데 사용함으로써 계속적인 큰 죄를 저질렀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것은 거룩한 불이 아니므로 "다른 불" 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런 불이 명시적으로 밝히 금지된 것은 아니로되, 하나님이 "명령하지 아니한" 것을 행하는 것은 충분히 범죄 행위이다-홀(Hall) 주교가 잘 보여 주고 있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제도를 벗어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예배 방법을 친히 처방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계시고, 그가 처방한 대로 행하기를 요구하시는 의를 가지고 계시고, 그가 명령하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는 복수하실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 관계해야 한다."
3. 분향은 언제나 한 번에 한 제사장씩만 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분향하려고 함께 들어갔다.
4. 저들은 조급하고 경솔히 분향을 드렸다. 저들은 조금도 조심성이 없고, 응당 갖추어야 할 경외심과 진지함도 없이 저들의 향로에 "왈칵 달려들었다" (혹자들은 그렇게 읽는다). 온 백성이 "여호와의 영광" 앞에서 "엎드러지는" (9:24) 때에, 저들은 자기들의 직무의 존엄성이 그러한 굴욕적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해 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들에게 허용되었던 친근성이 하나님의 위엄을 경멸케 하고 말았다. 게다가 저들은 제사장들이므로, 자기들의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 또한 저들이 분향하러 들어갈 때 술을 마셨다고 생각해 볼 만한 이유도 있다. 이 사건에 즈음하여 한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8절). 저들은 화목 제물의 잔치를 가졌었고, 거기에 딸린 전제(drinkoffering)를 먹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머리가 경홀해졌든가 최소한 저들의 "마음은 술을 즐거워하는" 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술을 마시고 율법을 잊어버렸다" (창 31:7). 그리하여 이 치명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6. 그 일은 고의적으로 되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모르고 그랬더라면, 최초에 선포된 율법의 혜택을 받아 속죄제를 가져옴으로써, 살아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9:2, 3). 그러나 "무릇 고의로 무엇을 행하면" 즉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위와 정의를 모독하여 범죄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민 15:30).
Ⅱ. 이 죄에 대한 가공할 처벌을 보자.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키니라" (2절). 제물 드리는 자들을 삼킨 이 불은 제물을 불사를 때와 꼭같은 방식으로 나왔다(9:24). 그것은, 무한한 긍휼이 대속물의 기초가 되어 그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는다면, 죄지은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가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이 불이 백성들에게 그토록 두려운 처벌을 내렸다면 앞으로 올 불의 심판은 더욱 두려울 것이다.
1. 이 처벌의 가혹성을 주시하라.
(1) 그들은 "죽었다." 웃시야처럼 단지 문둥병의 습격을 받거나, 스가랴처럼 벙어리가 되는 일을 당하거나 또는 그 향단 옆에서 이 두 가지 화를 동시에 입게 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둘 다 죽음의 습격을 받았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
(2) 저들은 갑자기 죽었다. 곧 범죄를 저지른 바로 즉석에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칠 겨를도 없이 죽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지만, 때로는 이렇게 속히 죄인을 벌하신다. 선고가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고의적인 죄인들은 신속한 멸망을 자초하며, 회개할 여유도 거부되는 것이 당연하다.
(3)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 즉 속죄소(흠정역:" 자비의 자리")를 가린 휘장 앞에서 죽었다. 자비 그 자체는 자신의 영광이 모독되는 것을 허용치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앞에서 죄지은 자들은 그 앞에서 죽었다. 저주받은 죄인들이 "어린 양 앞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했는데(계 14:10), 이것은 어린양이 저들에게 상관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해 준다.
(4) 저들은 "불로" 죽었다. 불로 죄를 지었음과 같은 것이다. 저들은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불살랐던 그 불을 경홀히 여겼다. 그래서 저들은 다른 불도 어느 정도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이 경외하지 아니한 그 불의 위력을 저들이 깨닫도록 해 주셨으니, 그것은 마땅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불에 의해서 자신을 순화시키지 않으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불에 의하여 멸망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 불이 제물을 사를 경우처럼, 그렇게 저들이 재가 되도록 불사르거나 저들의 옷을 태울 정도로 불사른 것은 아니었다(5절). 다만 번갯불처럼 저들을 즉석에서 죽게 친 것이다. 같은 불이 보여 준 이렇게 다른 효과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불이 보통 불이 아니라 전능자의 호흡에 의해(사 30:33) 점화된 불임을 알리셨다.
(5) 저들은 "자식이 없는 채로 죽었다" 는 사실이 두 번씩이나 성서 속에 특기되어 있다(민 3:4; 대상 24:2). 저들의 주제 넘은 짓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이 저들의 이름을 지워버렸고, 저들이 자랑하던 그 영예는 티끌에 묻히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인 것이다.
2. 그러나 여호와는 왜 그들을 그렇게 엄중하게 다루셨는가? 저들은 아론의 아들이요 여호와의 성도요, 모세의 조카며 하늘의 큰 은총을 입은 자들이 아니었던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성별하신 사람들이며 거룩한 관유가 저들 위에 뿌려지지 아니하였던가? 그 위임식 7일 동안 저들은 열심히 시중을 들었고 "여호와의 부탁을 지켰으니" 저들의 성급함이 속죄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아직 그 예식에 경험이 없는 걺은이들이요, 첫 실수를 저질렀으며, 저들의 승진을 기뻐한 나머지 저지른 일이므로 저들의 잘못은 변명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사람이 매우 필요한 시기였다. 많은 일이 최근에 제사장들에게 할당되었고, 제사장직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만 한정되었다. 그리고 아론에게는 아들이 넷뿐이었다. 그들 중 둘이 죽는다며는 회막 일을 다하기에는 일손이 모자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자식이 없는 채 죽는다며는 아론의 가문이 쇠약해질 것이며 그 제사장직은 상속자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상실되고 말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중에 어떤 것도 그 범죄를 변명해 주거나 그 범죄자들을 구제해 줄 수는 없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 죄는 매우 무거웠다. 그것은 모세와 모세에 의하여서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뚜렷하게 준행되어져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여기서는, 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것을 행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저들은 자기들 생각대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그의 백성들에게 복종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종과 같이 모든 것을 법대로 행하라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제사장들이 법을 어기고 불복종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될 수 없는 죄악이었던 것이다. 저들의 신분이 저들의 죄를 보다 깊게 만들었다. 아론의 아들, 특히 그의 두 큰아들이 그러한 고의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직속 시종으로 택하였었다. 저들의 죄악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조금 전에 불꽃 속에서 나타난 바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그 불이 공연한 것인 듯 자기들이 준비한 불을 이용했던 것이다.
(2) 그들의 벌은 필연적인 정의의 일부분이었다. 의식 제도를 안정시키려는 첫 단계에서 주어진 벌이다. 이러저러한 범죄자들은 백성에게서 끊치어지리라는 경고가 율법에는 종종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한 증거를 들어서 경고를 설명하신 것이다. 또한 제사에 관한 제 율법이 방금 제정되었다. 그 율법이 매우 하찮게 보이는 많은 세목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고로 누구든지 그 율법을 가벼이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율법에 대한 첫 범죄자들을 그렇게 가혹하게 처벌하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고요, 하나님은 예배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얼마나 질투적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율법을 크게 하시고 존귀케 하셨다" (사 42:21).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이것을 알아야겠다. 곧 저들에 관하여 율법에 종종 나타나 있는 그러한 경고, 곧 그들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등등을 행해야 한다고 하는 그 경고는 단순한 헛도깨비가 아니라는 점이다. 저들이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했을 때에 당하는 저들의 위험을 알려 주는 정당한 경고임을 알아야겠다. 또한 이러한 정의의 일례가 그 후에 일어날 많은 불의를 사전에 막아 주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찬가지로 성령, 곧 새로이 강림한 불을 고의로 속이려 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처벌을 받았다.
(3) 도덕법이 주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것은 율법의 약점과 또 그 율법은 죄를 제거할 수 없는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제사장들의 죄와 그 처벌은 처음부터 그 제사장직이 불완전한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서 아무도 보호해 줄 수 없는 무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한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사장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불법을 자행하거나 거짓 절차를 취하는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런 것은 있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첫 제사장들의 장례식 (레위기 10:3-7)
아마 나답과 아비후가 죽음의 습격으로 쓰러지자, 모든 사람들은 그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고, 저들의 얼굴처럼 모든 사람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감돌았을 것이 당연하다. 저들은 큰 놀라움에 휩싸여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모세는 태연했고, 자기가 해야 할 행동과 말을 알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경우를 당한 다윗처럼(삼하 6:8), 분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모세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고,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최대의 기쁨에 무서운 좌절을 불러 일으켰지만, 역시 그는 자기의 정신을 차렸고, 성소에서 지켜야 할 정당한 질서와 법도를 보존하려고 애썼다.
Ⅰ. 모세는 아론을 진정시키고, 이 슬픈 섭리에 복종하면서 선한 마음을 되찾게 하려고 애썼다(3절). 모세는 마치 역경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범과, 시기 적절한 충고와 위로를 줌으로써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었던" 것이다(살전 5:14).
1. 모세가 이 경우에 자기의 가엾은 형제에게 제안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라" 고 했다. 고통을 당할 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진 일임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것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 속에서는 성경 말씀의 성취가 깃들어 있음을 관찰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역사(役事)를 함께 비교해 보는 것이 선한 일임을 잊지 말자.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거기에는 경탄할 만한 조화와 일치가 있으며 그것들이 서로를 설명해 주고 돋보이게 밝혀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1)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서 이런 사건을 말씀하셨단 말인가? 우리는 그와 꼭같은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모세는 이 사건을 뒷받침 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했다. "여호와께 가까이하는 제사장들은 몸을 성결케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파할까 하노라" (출 19:22). 사실상 하나님의 율법의 전체적 주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절대권을 가지고 계신 군주이시니, 항상 성결과 경외와 정확히 그의 지시에 따른 예배로 경배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누가 하나님을 희롱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고 말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말씀을 뒷받침해 주는 말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29장 43,44절, 34장 14절, 레위기 8장 35절 따위이다.
(2)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인가?"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3절)는 말씀이다(여호와께서는 은혜를 베푸사 우리의 모든 심정 속에 이 말씀을 들려주고 계신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언제든지 영적 제사장으로서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이것을 생각하면 예배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매우 경건하고 성실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예배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둘째로, 또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그를 거룩케 해야 한다는 것, 즉 그의 성결에 대한 찬양을 그에게 돌려야 하며, 우리의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 없이 순결하고 선험적 완전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자답게 우리의 모든 신앙 예식을 거행해야 된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사 8:13).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성결의 찬양을 드릴 때, 그것은 우리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결은 곧 그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회중 예배를 통하여 그를 거룩케 할 때는 "온 백성 앞에서" 그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공언하고 또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감동 받기를 갈망하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거룩과 영광을 받으시지 못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벌을 가해서라도) 거룩과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홀히 여겨 그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에게 복수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세를 물지 아니하는 사람의 소유물은 압류하고 마신다.
(3) 그러나 이것이 당면한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왜 아론을 침묵케 했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아론의 아들들은 당연히 죽을 짓을 했다는 것 때문에 그는 잠잠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성결과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고로 그 백성에게서 그렇게 끊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필연적 정의의 행동(심판)이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리 가혹하게 보일지라도, 거기에 불평할 것이 아니라 순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2] 그의 아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심(私心) 없는 정의가 이 사건 때문에 모든 세대를 통하여 추앙받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그도 납득했음이 분명하다.
2. 이것이 아론에게 매우 좋은 영향을 주었다. "아론이 잠잠하니라" (문자적으로는 "평온을 지키니라")고 했다(3절). 즉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이 슬픈 섭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복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것이므로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했다" (시 39:9). 그는 (손해를 본 자는 뭔가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듯이) 불평을 늘어놓을 말이 있었지만, 그것을 지혜롭게 눌러 버렸다. 그는 "자기의 손을 그 입에 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뜨거웠" 으므로(시 39:9) "혀로 속임을 베풀지" (롬 3:13) 아니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하나님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죄악을 돌이켜 주신다면 그 때 우리는 그 징계에 잠잠하여 순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니, 하나님과 싸움을 건다든가 그의 정의에 도전한다든가, 또는 어리석게 하나님을 비난하는 따위의 짓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에 복종해야 하는 법이다. 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경우를 당한 엘리가 "이는 여호와시니, 그가 그의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이다" (삼상 3:18)라고 말했듯이, 죄악의 처벌은 참아야 할 뿐 아니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또 빌닷이 선포하는 대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득죄하였으므로, 그가 그들을 저들의 죄에 붙이셨다면" (욥 8:4),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 되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정의와 또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찬미해야 하는 법이다.
(2) 고통 중에 있는 가엾은 심령에 가장 큰 위로를 줄 수 있는 실제적인 주장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전해 주시는 말씀이시다. 그 말씀이 아론을 진정시켰던 것이다. 위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가혹한 처벌은 분명히 그에게 손실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플러스가 되었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아론은 거기에 대하여 한 마디도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다면, 아론도 만족했던 것이다. 아론은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을 찬양하려는 짓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이름, 집, 율법이 자기 집안의 명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비난과 멸시를 받게 되는 것은 조금도 원치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금송아지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 레위인은 "그의 형제를 인정치 아니했고, 그의 친자식도 알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곱에게 주의 심판을, 이스라엘에게 주의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 (신 33:9, 10).
사역자들과 그들의 집안 식구들은 때때로 괴로운 시련을 당하여 하나님께 대한 인내와 복종의 모범을 신도들에게 보여 주게 되며, 또한 그것을 통하여 자기들이 받은 위로로써 남들을 위로해 줄 수 있게 된다.
Ⅱ. 모세는 시체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쓰러진 곳에 그대로 버려둔다는 것은 불합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들, 또 이 참극을 목격하고 놀란 구경꾼들은 저들을 일으켜 세우거나 숨이 붙어 있는지 감히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이 이제 저들의 손에 닥친 이 큰 일을 모른 체할 수도 없었거니와, 또 그 일을 처리하기에 적당한 자들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 지내게 하라" (마 8:22).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할 일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자들 외에 그 일을 할 자가 없다면 만약-그들이 그 일을 하면 하나님의 일은 못한 채 버려두게 되므로-죽은 자들은 차라리 장사지내지 말고 버려 두라" 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이 문제를 돌보았다. 그들은 비록 저들의 죄악에 내린 정의의 손에 의하여 죽었지만, 정중히 매장될 수 있도록 돌보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4, 5절).
1. 이 장례에 그들의 가까운 친척 및 사람이 고용되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아버지의 친사촌들이었고, 여기에 이름이 나와 있다. 그들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이 일을 맡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은 레위인들이었을 뿐 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저들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 위임을 받기 전에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서라도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2. 그들은 시체들을 "진 밖으로" 끌어내어 매장했다. 즉 예배 처소나 그 예배 처소의 뜰에서 상당히 먼 곳에 매장한 것이다. 현대의 관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비록 성소 뜰에서 곧 진영 안에서 죽었지만 한 사람도 거기에 묻히지 아니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들은 나중에 가서 죽은 자들을 그들의 도성밖에 묻었다. 회막은 저들의 진 한가운데 쳐 있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시체를 장지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영 집단의 어느 하나를 통과해야 했다. 그것을 본 백성들은 틀림없이 매우 두려워했을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이름은 저들이 매우 존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 이름을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찬미하는 군중들의 존경과 관심을 집중시켰던 그들의 위임식 날 이후로는 더 이상 저들이 성소에 나타나리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나답과 아비후(이들은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적이 있는 자들이다. 출 24:1)는, 이제 나이가 많고 쇠약해진 모세와 아론 다음으로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은 자들로 여겨졌었다. 또한 그 백성의 희망이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위임식 소식이 채 백성들의 귀에 전해지기도 전에 백성들은 돌연 그들이 시체가 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았으니-그것은 곧 하나님의 정의에 희생된 제물이요 저들에게 하나님의 복수가 임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저들은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즉 "이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설 자 누구이리까" (삼상 6:20).
3. 저들은 그 시체들을 옷 입은 채로, 곧 제사장복을 입은 그대로 진 밖으로 내어갔다(아마 그대로 묻었을 것이다). 그 옷은 얼마 전 그들이 입고, 어쩌면 매우 자랑스러워했을 바로 그 옷이었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정의의 불편부당성이 선포되었고, 온 백성은 제사장복까지도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쉽사리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제사장들이 범죄했을 때도 벌을 면할 수 없었거늘, 우리가 어찌 벌을 받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랴?"
그리고 제사장복이 그렇게 즉시에 수의(壽衣)가 되었다는 사실은 "율법은 죽음을 이루느니라" (롬 4:15 참조)는 것과, 때가 오면 제사장제도 그 자체가 주 예수의 무덤 속에서 사라지고 매장되어 버리리라는 것을 암시해 준 것이다.
Ⅲ. 모세는 애곡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1. 제사장들은 슬픔을 표시할 수 없었다. 아론과 그의 남은 두 아들은 심려에 애통함이 있었겠지만, 이 슬픈 지경을 당하면서도 어떤 슬픔의 기색도 겉으로 나타내서는 안 되며, 회막 문 앞에서 한 발자국도 시체를 따라서 나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7절). 이리하여 나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이 가까운 인척이 죽었어도 대제사장은 애통하는 예식을 가지지 말라고 금지했던 것이다(21:11). 그러나 그때에도 하급 제사장들에게만은 그들의 가까운 인척이 죽었을 때 슬픔을 나타낼 수 있다고 허용했다(21:2, 3). 그러나 여기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 모두에게 금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실상 지금 저들이 꼭 해야 할(느 6:3) 중대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 시중을 듦으로써 저들의 친족에게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그들의 모든 예식이 그들의 직무에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는 중대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저들과 가까운 형제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에 더 큰 가치와 관심을 지니고 있음을 표시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셨다(마 12:47, 48). 또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우리에게 맡겨졌을 때는, 가능한 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며, 이 세상적인 생각이나 근심, 걱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무런 마음의 방해도 받지 말고, 오직 주 하나님만을 언제나 받들도록 하자.
(2) 저들의 형제들이 저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처벌로 죽음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제들의 죄를 후원하거나 그 처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들을 잃게 된 것에 대하여 애도하는 대신, 그들은 온전히 그 선고와 선고의 공정성을 찬미해야 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공적인 관심사는 우리 자신들의 어떠한 애착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더욱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는 그들의 복종을 권고하며, 통곡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경고했는가를 주목하자.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또 하나님의 진노가 온 백성에게 미칠까 하노라(6절). 너희들이 경외심과 복종심이 없거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 백성들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느니라." 그리고 또 한 번 "너희가 죽지 않도록 하라" (7절)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그와 같이 죽지 않을까 하여, 스스로 갑절의 경계를 해야 한다. 타인의 죽음 특히 돌연한 죽음을 보고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격하게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심과, 모든 죄악에서 떠나는 조심성과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지한 생각에 사로잡혀야 한다.
저들에게 애도의 뜻을 겉으로 표시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너희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이 너희에게 있기" 때문이었다(7절). 그러므로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직임을 다함으로써 그 기름의 영예를 주의 깊게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은혜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죽음을 이루는 세상의 슬픔" 으로 마음에 혼란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물론 아론과 그의 아들로서는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당하여 어처구니없는 그 슬픔을 자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성과 은총이 그 격정을 통어해 주었고 그들은 복종하는 인내심으로써 그 고통을 견디어냈던 것이다.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행했다" 고 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복하여 저들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자들은 행복하도다!
2. 백성들은 애도하라고 했다.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고 했다(6절). 회중은 그들의 제사장들을 잃었고, 특히 그 사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분노로 인하여 슬퍼해야만 했다. 그들은 저들을 불사른 그 불을 슬퍼해야 했으니, 그것은 그 불이 더 이상 사람을 불사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는 이 섭리에 지나친 충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슬퍼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족속은 그 사건에 지나치게 냉담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애통하라는 명령이 내린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본성)은 항상 은혜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하니, 필요에 따라서 금지되기도 하고 제한되기도 하는 것이다.
제사장들에게 주는 주의 사항 (레위기 10:8-11)
아론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시는 모든 것을 매우 성실히 준행했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영광을 그에게 베풀어 주셨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8절). 더욱이 지금 아론에게 이야기된 그 말씀은 모세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즉 모세가 이 말씀을 들었다면 아마 아론이 지금까지 탐식가요 주정뱅이였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흔히 비난을 들을 때처럼 주의를 들으면 분개하기가 일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네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죽음을 면하라" (9절). 음주는 저들의 생명에 위험을 주는 일이었다. 아마 그들은 나답과 이비후를 통하여 음주의 악영향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충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금령의 내용은 무엇인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통례는 음주가 그들에게 허용되었다(모든 제사장이 나실인처럼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무 시간만은 음주가 금지되었다. 이것은 에스겔 성전(겔 44:21)의 한 율법이기도 하다. 복음의 사역자들에게도 "술을 즐기지 말라" (딤전 3:3)고 요청되었다. 술 취한다는 것은 언제나 나쁘다. 그러나 사역자들에게는 특별히 수치스런 일이요, 악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들의 머리와 마음은 누구보다도 맑아야 하기 때문이다.
2. 그 금령에 첨부된 형벌. "죽음을 면하라. 네가 술을 마시면 죽을까 하노라. 그렇지 않으면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참조). 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부단히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으며,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그 위험을 조심해야 한다(벧전 4:7).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고전 15:32)고 말하는 자들처럼, 술이 그렇게 방탕한 동기로 사용되어야 한다면 가엾은 일이다.
3. 이러한 금령을 주게 된 이유. 제사장들은 언제나 맑은 정신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의 직무를 정당히 이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포도주로 인하여 몸을 그릇되게 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사 28:7). 저들은 분명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1) 그래야 집무 시에 거룩한 것과 범상한 것을 식별할 수 있으며, 결코 그것들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10절). 여호와의 사역자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한 것과 귀한 것" 을 구별해야 한다(렘 15:19).
(2) 또한 그래야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11절). 가르치는 것도 제사장들의 한 업무이다(신 33:10). 또 술취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령을 가르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육을 따라 사는 자들은 영적인 것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선생들은 자기들이 한 손을 쌓은 탑을 다른 한 손으로는 무너뜨리고 말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실수 (레위기 10:12-20)
이러한 단절의 사건이 지나고, 모세는 아론에게 그의 직무를 계속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고통을 당한다고 의무에서 이탈할 것이 아니라, 더욱 열심히 하도록 되어야 한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남은" 아들들에게 말했다(12절)는 사실을 주목하라. 저들의 생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뜻이 있는 것이다.
1. 아론은 두 아들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사 다른 두 아들을 남겨 두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로를 받아야 하고 남은 생존자로 인하여, 특히 그의 아들이 모두 죽지 아니했음을 감사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시로서 즐거이 직무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 두심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겠다는 한 언약이지 그 일을 떠나라는 뜻은 아니다. 네 제사장들이 함께 위임되었으나, 둘은 데려감을 당하고 돌만 남았다. 그러므로 남은 두 제사장들은 앞에 간 두 사람의 책임까지 벌충하도록 힘쓰면서, 제사장직에 갑절의 관심과 성실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Ⅰ. 모세는 이미 앞에서 말했던 지시, 곧 제물 중의 제사장들의 몫을 먹으라는 지시를 반복했다(12-14, 15절). 제사장들은 10절에서 들은 것처럼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법도 배워야 하지만, 지극히 거룩한 것과 먹을 수 있을 만큼만 거룩한 것을 또한 분별할 줄 알아야 했다. 제사장에게 돌려진 소제물의 부분은 지극히 거룩했다. 고로 회막 뜰 앞에서 먹되 아론의 "아들들" 만(12, 13절)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화목 제물의 가슴과 뒷다리는 회막 뜰 밖의 어떠한 곳이든 적당한 곳에서 먹을 수 있었고, 제사장 가족들의 여자들도 먹을 수 있었다. 번제에 첨부해 드리는 소제는 전체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드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목제는 인간의 기쁨과 위로를 증언하기 위해 명령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자, 곧 소제는 더욱 신성한 제물이었으며 보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했다. 이러한 차이점을 제사장들은 세심히 알고 있어야 한다. 모세는 이러한 차이점에 어떤 이유를 붙이지 아니했다. 다만 지시 사항을 말했을 뿐이다. "(이는) 내가 명령받았기 때문이니라" (13절). 이것이면 실상 이유는 충분했다. 그가 "그들에게 전한 모든 것은 주님께 받은" 바이다(고전 11:23).
Ⅱ. 모세는 지시를 어긴 한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때에 발생한 사건인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사건이다-"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 로 드릴 한 염소가 있었다(9:15). 그런데 그 속죄제법은 이러했다. 즉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처럼 그 속죄 제물의 피를 거룩한 곳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경우에는, 그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다.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성소에서 제사장이 그 고기를 먹으라고 했다(6:30). 그 뜻이 여기에 설명되어 있다(17절). 즉 이로써 제사장들이 "회중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되신 분-하나님은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지우셨다" -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때는 속죄 제물인 염소의 피를 성소에 가져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고기를 진밖에 내다가 불살라 버린 모양이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관찰해 보자.
1. 이러한 규칙 위반에 대하여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점잖게 훈계했다. 이에 아론의 아들들은 "남은" 아들들이라는 말이 다시 나온다(16절). 그러므로 이들은 경고를 받아야 했다. 모세는 그들에게 "노하였다" 고 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유순한 사람이었지만, 역시 화를 내야만 했던 것이 분명하다. 모세는 하나님께 불순한 자가 있거나 모독을 돌린 자가 있을 때, 또 제사장들이 위험에 빠져 있을 때는 화를 내곤 했다. 그러나 저들이 부딪힌 고통을 감안하여,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 앞에서 얼마나 온유하게 대하였는가를 주목하자. 그는 "그들은 그것(속죄 제물 고기)을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도다" 라고만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상처를 주신 자들의 아픔을 다시 이야기하기는 싫어했으므로, 저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던 것이다.
2. 아론은 이 실수에 대하여 그럴 듯한 변명을 했다. 모세는 그 잘못을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돌렸다(6절). 그러나 그들이 한 것은 아론이 시켜서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론이 이에 대하여 변명을 한 것이다. 아론은, 이 제사가 회중을 위한 속죄제이며, 속죄 제물은 소일 경우에는 모두 불살라야 했으니(4:21) 염소인 경우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변론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명령된 것은 소가 아니었으므로, 아론이 이렇게 번거로운 변명의 수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19절).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매우 괴로운 듯이 말했다. "이러한 일이 내게 임하였도다" (19절). 곧 이러한 슬픈 일들이 그의 마음을 점령하여, 그 마음을 매우 무겁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 중에서 취하여진"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나 거룩한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도 자연적인 애증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는 잠잠했다(자기의 평화를 지켰다:3절). 그러나 다윗처럼(시 39:2) 그의 슬픔이 그의 감정을 고조시킨 것이다. 고통 속에 임한 하나님의 뜻에 성실히 복종하는 가운데서조차도 깊은 고통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런 일, 곧 전에는 결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 내가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로다. 나의 식구들이 죽는 것을 보니, 나의 심령도 낙심할 수밖에 없나이다." 이와 같이 고통스런 사건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면, 오히려 그 고통을 가중시키기 쉽다. 그러므로 말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욱 낫다.
(2) 아론은 속죄 제물에 관한 지시를 변경시킨 데 대하여 변명을 했다. 아론은 그 슬픔과 고통스러운 마음을 지니고는 그 고기를 먹을 수 없었노라는 것이다. 이런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었겠는가? 그는 마음에 너무 괴로워 그 고기를 먹을 식욕이 없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우리의 모든 종교적 예식에서, 특히 주의 만찬에서 바라고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 그것이다. 주의 만찬에 우리가 참예하는 것은 속죄 제물을 우리가 먹는 것이다.
[2] 이 세상의 슬픔은 우리의 거룩한 의무를 즐거이 실행하는 데에 큰 방해가 된다. 슬픔은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며, 우리의 수레바퀴를 빼앗아가므로 우리를 매우 서서히 움직이게 만들뿐 아니라(삼상 1:7, 8), 당신을 즐거이 섬기기를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신 12:7). 애도자의 빵은 더러운 것이다(호 9:4; 말 3:14 참조).
3. 모세는 이 변명을 묵인했다.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 (20절). 아마 모세는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나님은 먹을 수 없는 것은 불태우라고 하였었다. 죄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런 이유로, 우리가 의무 이행에 부적합해진 경우에는 거기에 대하여 충분한 용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이며, 그를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모세는 정상을 매우 깊이 참작하여 그 실수를 가벼이 여긴 것 같다. "마음은 참으로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아론의 심적 상태를 고려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아론은 그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이처럼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용납을 바라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잘못을 감찰하시어 진멸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도 시험받을까 두려워하며" (갈 6:1), 남에게서 어떤 실책이 발견되더라도 지나치게 가혹한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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