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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불가 (IP: *.113.77.215)조회 수: 28778, 2012.11.26 21: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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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naver.com/anyquestion
2. 양태론
1. 양태론이란 무엇인가?
앞 의 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삼위일체란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으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태론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태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 를 들자면 필자는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된다는 사역적(경륜적)인 양태론이 있으며, 또 성부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성령이 되었다는 승계적인 양태론이 있다고 하였다.
이 러한 양태론은 한 실존적인 인격의 세가지 양태(Mode)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들은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일반 성도들이 자칫 범하기 쉬운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기도 하며, 특히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목회자와 신학자들도 이러한 양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물의를 빚고 있다.
본인의 세 양태, 사장과 권사와 가장이라는 사역적인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교류나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세 양태가 동일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역적인 분류를 곧 경륜적삼위일체(사역적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4세기 무렵에 잠시 있던 견해로서, 물론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마 찬가지로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곧 승계론적인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 역시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 시절의 본인과 고등학교 시절의 본인과 대학교의 시절의 본인이 상호교류 할 수 없으며, 그 세 본인은 한 인격이므로 상호 인격적인 구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러한 주장들은 모두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성부하나님 자신이 되어지므로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벨리우스, 노예투스, 파락세아스, 세르베투스, 스웨덴보그,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등이 있었는데, 양태론도 몇가지 유형을 갖고 있지만, 그 유형은 모두 동일하며, 결국 단일 인격의 세양태를 말하면 양태론이된다.
그렇다면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뒤에 양태론자인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와 베뢰아 김기동목사의 실제적인 주장을 그 책명과 페이지 수를 밝히며 소개한다.
양 태론자들은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인격을 구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이 양태론에 대해서 정통신학서적을 참고하려는 이유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많은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인 것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양태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가 곧 한 인격으로서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어 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 자신이 성자 예수로 오셨고, 성자 예수가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은 분명한 양태론이다. 또 삼위를 사역적(경륜적)으로만 구별하는 것도 양태론이 분명하다. 실제적으로 양태론은 동일인격의 세 양태(양식)이기 때문에, 그 세 양태는 서로 인격적인 구별과 상호교류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 347쪽)
"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관 중 삼위일체의 문제, 특히 성부와 성자의 내적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단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했다고 보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 바로 성부 자신이었기에 성부수난설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의 단일성과 조화시키고자한 단일신론자들이었다.(교육목회협의회, TBC 성서연구. 546 쪽)
이제 유명한 신학자들의 교과서적인 신학서적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이제 무엇이 올바른 삼위일체이며, 무엇이 양태론인지 충분히 분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 세가지 양태, 즉 구약에서는 성부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로 오시고, 오순절이후에는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혹은 한 인격이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고 하는 견해도 양태론이다.
정통삼위일체는 인격에서는 상호교류가 가능하도록 구별되지만,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2. 양태론자 위트니스 리(지방교회)와 김기동목사(성락교회. 베뢰아)의 주장
그렇다면 명실상부한 양태론자인 지방교회의 지도자인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하여보자.
# 왜 그 분의 경륜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분의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363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ꡓ(하나님의 경륜, 16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위 의 글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이다, 워치만 니와 함께 위트니스 리를 지방교회는 사도라고 부른다.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100% 지방교회의 교리로 보아야만 하며, 그는 지방교회의 실제적 교주라고 볼 수 있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계속 살펴보자.
지방교회는 언제나 자신들이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한다고 위장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은 세 인격을 구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보면 그러한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곧 알 수 있다.
# 아버지, 아들, 영 가운데서 <첫째분과 마지막 분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 아버지, 아들, 영에서 마지막 분인 그 영은 삼일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시다. 하나님은 <셋이 아니시다>. 그 분은 하나이면서 셋인 분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6쪽)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아예 위트니스 리는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한다.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하나님. 439쪽)
그렇다면 이제는 성락교회 김기동목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이 분이 나타났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에는 본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영들이 많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십니다"(성령을 알자 88년도, 74쪽)
양태론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논리이다.
한 인격을 말하고 있으며, 세 가지의 형태의 하나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며,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시면 본영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을 살펴보자.
"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성령받고 우리도 성령받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지만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에는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 속에서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늘로 가신 다음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교회 안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성경을 알자, 96쪽)
“구약의 하나님의 신, 하나님이 보내신 영들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108 페이지)
“구약시대에는 모두가 천사에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마귀론 61페이지)
“창세기 1장2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를 운행하시니라" 할 때의 그 신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65 페이지)
“본 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예수를 알고 최초로 하나님을 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성령이 내주한 적이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세상에 임하셨습니다.”(마귀론 상 65쪽)
“비 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고 또 아버지의 뜻이 없었다면 아들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성령을 알자 46-47쪽)
구약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여 천사라고 주장하는 김기동목사는 구약에서 성령과 성부하나님의 사역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공존적인 동시사역을 주장하게 되면 그의 양태론이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베뢰아의 강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보기로 하자.
그의 삼위일체가 양태론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준다.
더 이상 오해이며 그런 뜻이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 못할 것이다.
" 베뢰아에 와서는..... 여기는 장로교도 아니교 침례교도 아니고 베뢰아 입니다. 그러니까 깨끗히 일단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종이에다 그려야 합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객체의 인격을 두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이 있고 예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예수가 있고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아버지가 있고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인격, 성령의 인격, 3위의 인격이 각각 세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인격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러면 인격이 각각이면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지금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버지의 인격이 따로 있고 아들의 인격이 따로 있고 성령의 인격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학적으로 굉장히 무식하고, 성서적으로 굉장히 무식하고, 언어학적으로 굉장히 무식한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따로 생각하고 인격을 셋으로 만들면 큰일납니다. 아버지의 인격이 따로 있고 성령의 인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볼 때 성령의 인격, 이쪽에서 아들의 인격, 이쪽에서는 아버지의 인격, 오직 인격은 하나입니다. ……각각 보는 방향에서 다른 것같이 이쪽에서 볼 때 얼굴, 뒤쪽에서 보면 뒤통수, 옆에서 보면 볼인 것 같이 인격은 하나입니다. 지금 객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은 한 인격이십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따로 따로 되는 것이 아니고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 바로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 안에 있을 때 성령이 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이에게 하시는 겁니다."(베뢰아 강의 9-1. 1983. 6. 25. 참고: 교회와 신앙. 최삼경목사의 베뢰아 비판 참조)
위트니스 리와 김기동목사의 주장은 양태론이 분명하다.
지방교회와 성락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변명은 물론 거짓말이다.
지방교회가 이러한 거짓변명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지방교회와 같은 양태론자들은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데, 한마디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짓말이다.
3. 상호내재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14;10, 11)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in) 거하는 복합적인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다.
자칫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몸을 자신의 안으로 삼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런데 이 성경구절이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야기시켰던 문제의 구절이었다. 이러한 상호내재를 초대교회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셋이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윤무(輪舞)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페리코레시스를 “상호내재”라는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내재함>이 모두 있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동시에 존재함은 같은 시간에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310쪽)
# 아버지, 아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완전히 믿는다."(하나님, 305-306쪽)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삼일신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들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중적으로 존재하는데, 이 셋은 분리되어지지 못하며, 항상 동시존재한다는 것이다.
# 삼위양식설은 나무나 멀리 빗나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상호내재함과 동시에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 삼위양식자와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 즉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동시에 존재하며, 같은 상태 아래 있음을, 그 상호내재성과 동존재성을 믿는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307쪽)
즉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이 함께 있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있으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기에 자신들은 양태론과 다르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코메디와 같다.
지 방교회의 주장, 즉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이 되었다는 양태론(승계설이라고 하는 양태론)에 대해서 토론자가 지방교회를 비판하면,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호내재의 개념도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의 개념과 다르며, 결국 양태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하면 양태론을 모면해 볼까하는 궁리끝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지방교회의 신학적 정체가 더욱 오류와 모순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위트니스 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하나님의 세 단계와 세 과정으로 보았으며 한 인격, 한 실제의 세 형태를 주장한다. 그런데 그 삼위가 하나님 안에 동시에 공존하는 성분이나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위트니스 리의 다음 주장을 살펴보자. 분명한 양태론이며 계승설이다.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의 하나님 297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 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 최종완성이라는 단어는 일이나 혹은 과정이 완성되거나 끝났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음식을 요리하는 것으로 예시할 수 있다. 요리하는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식품은 날것이다. 두시간 동안 요리된 후에 식품은 만찬으로 최종완성된다. 성육신 전에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 신성만 갖고 계신 날것이었다.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최종완성되었다. 이제 그분은 더 이상 날 것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성과 인생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능력있는 부활과 그리고 초월하는 승천을 지니신 최종완성되고 완결된 삼일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들은 과정을 거치고 최종완성되신 삼일하나님 안에 있는 요소이자 성분이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하나님. 53-54쪽)
# 하나님의 영은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최종 완결된 영이 되셨다. 그 분은 먼저 인성을 입으시고, 그 다음 부활 안에서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부터 생명주는 영이 나왔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9쪽)
#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삼십삼년반을 사셨을지라도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가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고 그 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이 되시어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갖게 했다.(67쪽)
# 그리스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신성한 부분은 그 영이자 하나님 자신이자 거룩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온 존재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 안에 거룩의 영을 갖고 계셨으므로 바로 그 영이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게 하셨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랑의 합당한 삶. 44쪽)
위트니스 리는 성자와 성령을 성부하나님 자신이 직접 거치는 단계와 과정으로 본다.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곧 십자가에서 죽은 분은 하나님자신이 되고만다.
그런데 그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러한 변명은 다음 세가지의 거짓말로 판명되어진다.
시간적인 차이를 갖고 승계되는 장래의 세 과정과 세 단계가, 어떻게 한 인격 안에 삼중적으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으며, 상호교류할 수 있는 구별되는 인격이 되어지는가?
이러한 주장은 스스로 오류와 모순을 갖고 있으므로 너무 유치한 주장이 된다.
즉 본인이 중고등학교 시절의 과정을 거치고, 대학시절의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본인이 되었다고 가정을 하자.
현재의 본인과 중고등학교 시절의 본인과 대학시절의 본인이 나에게 상호내재되었다는 주장이 한 인격인가, 세 인격을 말하는가?
현재의 본인과 증고등학생시절의 본인과 대학시절의 본인이 인격적인 상호교제를 할 수 있는가? 본인의 인격과 중고등학생시절의 본인 인격과 대학시절의 본인 인격이 서로 시간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는가?
이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양태론이라는 비판을 모면해 보려는 엉터리 개념일 뿐이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상호내재란 그들이 양태론임을 피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위트니스 리는 그동안 삼위가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라고 주장하여 왔음을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다. 즉 그가 말하는 상호내재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 거치는 세 단계, 세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을 보자....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성령. 190쪽)
만일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 분리될 수 없다고 하면, 서로가 서로를 파송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고, 또 성자가 성령을 파송한다는 언급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가 보내심을 받으면 모두가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일인격이 동일인격을 파송할 수가 있는가?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인격이 나의 대학시절의 인격을 파송할 수 있는가?
게다가 위트니스 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주장하는 코메디를 연출한다.
그 들의 삼중적인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백번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셨는데, 보내시는 성부하나님 안에서도 삼위가 상호내재하고, 보내심을 받은 성자와 성령에게도 각각 삼위가 상호내재한다면, 삼체구위가 되고만다.(언제나 상호내재, 동시존재하며,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곧 오류로 밝혀지며, 이런 추궁을 하면 지방교회는 답변을 하지 않으며, 삼신론자니 뭐니 하는 개인적인 욕설과 비난만을 늘어 놓게 된다.
이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성경은 너무 깊이 따지지 말고 그대로 그냥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인격을 실제로 구별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양태론은 성경적으로 명백한 모순임이 쉽게 드러나므로 한번도 정통신학인 적이 없었다.
지방교회에 있어서 구약의 하나님의 영과 신약의 성령과 부활후의 영(생명주는 영)이 그 개념이 다르다. 만일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 혹은 영(성령)이 성부하나님과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령이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 방교회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단계와 과정을 거치고 변화하여 최종완결된 것이 부활후 영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오순절 이전의 성령은 부활후 성령과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신과 신약의 성령, 오순절 이후의 성령이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정통신학도 있는가?
#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지만, 그것은 최종 완결된 영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과 성령도 최종 완결된 영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 계시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후였다. 이 영은 창세기의 하나님의 영, 구약의 여호와의 영, 마태복음 1장의 성령과 다르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7-28쪽)
지방교회의 삼일신론은 전통적인 삼위일체와 전혀 다르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이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구약의 하나님의 신과 영을 성부하나님과 동일시 한다.
또 성락교회 김기동목사는 구약의 하나님의 신과 영은 성령이 아니라, 천사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구약의 하나님의 신과 영은 성령이 되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78쪽)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주장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며, 양태론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 오히려 자신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위장하고 있다는 자체가 그들의 위험성을 더하여 준다.
그렇다면 지방교회는 아래의 주장과 같이 아들과 아버지와 영을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공표할 수 있는가? 혹은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의 견해는 다르다고 변명할 수 있는가?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성령 48쪽)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일인격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이 한마디의 고백은 지방교회가 양태론임을 명백하게 증거하고도 남는다.
캘빈의 시대에는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가 있었다.
그의 주장과 지방교회의 주장을 비교함으로, 여러분은 지방교회의 삼중적인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이 아니며 이단적인 양태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메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메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34쪽)
지방교회는 세 위격을 삼중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 셋이 언제나 함께 한 공간 안에만 국한되어있고 분리되지 않음으로 실제적으로는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이 말하는 삼중적이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공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지방교회는 구약에서는 외부적으로 하나님만이 사역하셨고,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예수로 오셨다고 보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결국 육신을 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며, 죽음과 부활후에는 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말하는 한 인격 안에 상호내재하는 세 인격은 실제의 구별이 아니며, 단지 추상적인 개념의 삼중적이라는 명칭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삼위는 결국 하나님 자신이 거치고 변화되는 단계와 과정을 의미한다.
그들의 상호내재란 삼중적인 요소이며,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인격이 아니고, 즉 양태론을 위장하기 위한 추상적인 변명일 뿐이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문장에서 하나님은 히브리어상으로 삼중적이다. 더욱이 같은 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르키는 대명사 '우리의'를 사용한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비밀, 17쪽)
위트니스 리에게 삼위는 한 인격, 한 영에 포함된 성분과 같다.
"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고, 그 영은 아들의 실제화이기 때문에, 최종완결인 그 영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도 포함된다. 수학에서 25 더하기 15 더하기 30은 70 이다. 70은 합계로서 25, 15, 30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최종완결의 그 영은 아버지, 아들, 영을 포함한다. 아버지, 아들, 영은 모두 그 안에서 최종 완결된다.(한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7
또한 성락교회 교인에게 그들의 삼위일체가 양태론이라고 비난하여 보라.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펄쩍 뛴다. 김기동목사의 양태론적인 주장이 기록된 책을 인용하면 그들은 오해라고 변명한다.
김기동목사는 책에서 자기 주장조차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인가?
김기동목사에게 영향을 받은 몇몇 목사들은 왜 하나같이 양태론을 주장하며, 성락교회를 그만 두고 빠져나온 목회자들은 왜 김기동목사가 양태론자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가?
5. 상호내재의 교회사적 증거
이 부분이 지방교회가 자신들을 정통삼위일체라고 가장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이 되어진다. 지방교회는 필자의 공식토론 제안에 대해서 이 주제만을 특별히 토론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부분에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결 론적으로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란 정통신학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장하기 위한 거짓조작이다. 다른 이단들과 달리 지방교회는 토론에서 자신을 위장하고 감추며, 남을 모함하고 왜곡시키는 곳이며, 그들이 과연 신앙인인가하는 의혹이 들었던 적이 있다.
상호내재에 대해서 교회사적인 증거를 설명하여보자..... 과연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인가?
“페리코레시스”를 “상호내재”라고 해석하면, 장소적인 개념으로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페리코레시스”는 위격들의 상호점유(co-inherence of the persons: 헬라어로는 perichoresis, 라틴어로는 circuminsessio)라고 하는 용어이다.
원래,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상호내재가 아니라, 상호교류나 상호순환, 혹은 상호침투, 상호상통이라는 개념에 더 가까우며 실제 그렇게 번역되어지기도 한다.
원래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라는 단어는 오리겐의 종속설과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제시된 단어였다.
즉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들과, 혹은 성부라는 주격 안에 종속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인격이 있다는 오리겐의 종속주의적인 주장에 대항하여,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것을 반박하기 위하여 "페리코레시스"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본질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요한복음14장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그 교회사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상호점유라는 용어는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하게 되므로서, 이단들과 종속주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일격을 가하게 된다.
# 갑바도기아 모델의 장점부터 얘기하자면, 상호점유론으로 대표되는 사상은 의심할 바 없는 진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에 횡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한 싸움에서 천재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라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였다. 갑바도기아 모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위격 들 각각이 서로 혼란이 없이 충분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91쪽)
정통적인 “상호내재”란 "한 장소에 동시에 거한다"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종속주의에 대항하여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본질을 가졌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종속주의란 것은, 하나님이 제일 크시고, 예수와 성령이 그 하나님 안에 포함 혹은 종속되어있다는 주장을 말한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이 예수는 하나님에게 종속된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말한다.
그 상호점유라고 하는 성경적인 증거로 종속주의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정죄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논리는 매우 진보된 이론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상호점유는 본질적인 점유, 신적본질이 동일하다는 개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는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후대의 비판을 받게 된다.
종속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사라지자 이제는 그 용어를 양태론자들이 악용했기 때문이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 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상호점유라는 증거는 종속주의와 같은 이단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진보된 논리였다. 그러나 후에 그 용어가 위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으로 비판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용어는 오늘날의 지방교회와 같은 양태론자에게 악용되어지게 된다.
즉 지방교회는 종속주의에 대항하였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교회사로부터 빌려와, 자신들의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지방교회는 어거스틴도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도 양태론자인가 라고 되묻는다.
이 미 설명하였다시피, 이 “상호내재”가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의 시대에 이르러 양태론자들에게 잘못 사용되어졌던 것이다. 즉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삼위가 구별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일으켰고,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는 성공적인 삼위일체 이론이 아니었다는 평을 받게 된다.
이 페리코레시스란 용어는 지금도 정통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와 같은 이상한 상호내재는 사용되지 않는다.....그것은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호교류, 상호순환, 상호침투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래서 정통신학적인 상호내재는 삼위의 인격이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라는 개념과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적본질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지고 있다.
김석환박사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보면 그 서문의 추천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부 현대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학적 문제점을 감추기 위하여 이 정통교부들을 끌어와 극찬함으로서 마치 자기들의 신학적 입장이 정통임을 은근히 과시해 왔다”(추천사, 서철원교수)
즉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이단적인 주장을 감추기 위하여 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주장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며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통이라고 위장해 온 것이다.
다음 글의 내용은 “결론”이라는 제목으로 김석환박사가 직접 쓰고 있다.
“한 편 세 번째 소주제인 페리코레시스 이론과 관련하여 헬라어인 페리코레시스 용어 그 자체를 분해해 보면, 페리코레시스 용어는 다소 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내주의 의미도 포함하지만, 다소 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관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호관통(상호상통)의 의미에서의 피리코레시스에 관한 진술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격들의 삼위성에 관하여 진술할 때, 상호내재(공통내재)의 의미에서만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49쪽)
어거스틴은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을 상호내재라는 장소적으로 알았고 상호상통, 상호교류라는 동적인 개념으로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하였듯이 어거스틴은 실제로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결국 이 상호내재란 개념이 종속론에 일격을 가하는 이론이엇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빌미를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상호내재란 개념이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안된다. 상호내재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여야만 한다.
어거스틴과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상호내재라는 용어로 인하여 양태론자라는 오해를 받았지만, 그들은 양태론자가 아니었다.
갑바도기아 교부인 바실은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를 상호교류, 혹은 대자성의 관계로 강조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므로써 그는 양태론자들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필자주: 초대교부)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필자주:양태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바실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정확하게 페리코레시스를 상호교류, 순환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본성의 동일성과 함께 위격의 구별성, 별개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바실이 분할 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은 위격이 아니라 신적본질을 가르킨다.
# 우리는 위격들의 상호내재성, 즉 후에 이른바, 페리코레시스(교류, 상호순환)라고 불리우는 교리를 발견한다. 신성은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세 위격들 속에는 '본성의 동일성'이 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위격들의 구별에 따라서는 둘이 별개이나, 본질의 공유에 따라서는 하나이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바실 교부의 견해, 150쪽)
그렇다면 현대의 조직신학자가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웨인그루뎀은 분명하게 독립된 삼위와 독립된 개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다음은 상호내재를 말하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주석성경과 정통조직신학책을 살펴보자.
오픈2 주석성경은, 박형용교수, 유재원교수, 윤영탁교수가 주석의 감수위원으로 적혀 있다. 그 설명도 명백하게 구별되는 인격과 본질적 동일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다음은 웨슬레목사가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이다. 그도 고유의 인격성과 함께, 본질의 단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지방교회는 본인과 토론에서 위의 웨슬레의 글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면서, 웨슬레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하다가 본인에게 발각되어 큰 창피를 당한 적이 있다.
웨슬레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하면서 “고유의 인격성의 구별과 본질의 단일성”에 대한 설명을 고의로 생략하였던 것이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489쪽)
한분의 하나님은 단지 한분의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한분의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세가지 관계성이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위격으로서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분은 아들이요, 저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종성박사의 글이 요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주고 있다. 삼위일체에서 동일한 것은 존재 안에 있는 관계성(상호교류, 상호상통)이다. 그러나 위격으로서는 서로 전적으로 다르다(인격의 구별)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정통신학이 말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사적인 교리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방교회의 주장을 맞는지 틀린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을 하며 미혹을 하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지방교회는 이 상호내재를 장래의 하나님과 성도에게도 적용시킨다. 즉 하나님과 사람은 한 실체, 한 인격, 한 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지방교회의 신인합일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소위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구원론이며 천국관이며 재림이며 부활인 것이다.
루이스 벌콥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인합일론적인 연합에 대해서도 구별되는 인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통신학자들은 모두가 구별되는 고유의 인격, 독립적인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C.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또 지방교회는 주와 합하는 자는 그들의 신인합일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로 “한 영”이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본문을 전후로 살펴보자.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 된다”고 지방교회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동일한 적용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만일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창기와 합하는 자도 한 몸, 한 인격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을 앞뒤로 읽어보라.... 그 성경본문은 양태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비난하고 경고하는 내용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삼가하라는 것이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같은 음란함이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지는 자가 된다..... 즉 창기와 같은 음란한 자가 된다..... 그리고 주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는 자가 되어진다.... 주님과 같은 거룩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창기와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그 고유의 인격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와 합하는 자는 주가 된다고 해석하여야 하는가?
예를 들어 "우리 남선교회가 하나가 되자"고 하였을 때에 그 "하나"가 한 인격이 되자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 남선교회는 고유한 인격을 구별하면서, 같은 믿음, 같은 뜻, 같은 목적의 유기체적인 연합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들은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된다는 것을 한 인격, 한 실체가 되는 것을 해석하는가?
자신들의 황당한 신일합일 교리를 성경을 짜깁기로 맞추려고 시도를 하다보니....이러한 엉터리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동안 신인합일을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지방교회가 이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성경본문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이제 지방교회가 말하는 궁극적인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나타난다.
그들은 지방교회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이 되는 것을 가르킨다
결국 그들은 명칭만을 삼중적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삼위의 인격을 구별한다고 말한 것이 모두 거짓말로 밝혀지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지방교회의 상호내재하시는 삼위하나님은 결국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을 가르킨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도를 포함하는 상호내재는 성도와 하나님이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만 일 상호내재가 삼위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방교회의 신인합일도 하나님과 성도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만 하며,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의 아래 주장에 대해서 지방교회는 그가 이단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 또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사실은 상호내재이다. 상호내재는 연합보다 깊다. 오늘날에도 우리와 하나님은 두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된 한 실체가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새 예루살렘, 391쪽)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있다. 우리는 그 분과 한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당신 안에 담기 위한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45쪽)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지금까지 살펴본 양태론과 신인합일론, 이 두가지를 위트니스 리는 성경의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공급(양태론)과 분배(신인합일)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양태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양태론은 미미한 차이같지만 모든 이론을 바꾸어 놓는다.
결과적으로 양태론자에게는 예수도 하나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영으로 최종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가시적이고 신체적인 재림예수도 이미 영으로 변화되었으므로 오지 않는 것이다.
6. 경륜적 삼위일체
이 들이 상호내재와 함께 주장하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이 용어는 교회사나 정통신학을 아는 사람에게는 섣불리 사용하지는 않지만, 초신자들은 생소한 용어이므로 속이기 쉽다. 양태론에서 가장 쉽게 파악되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예수와 기도를 받는 성부하나님의 인격적인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예수가 곧 기도를 받는 하나님이므로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 되고만다. 이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즉 삼중적으로 동시에 거하는 상호내재를 주장하다보니, 예수님의 안에는 하나님과 성령이 함께 동시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부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자기가 자신안에 있는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고만다.
즉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성부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므로, 결국 양태론이 되고 만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뜻밖의 주장을 한다.
#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하나님 323쪽)
왜 위트니스 리는 스스로 모순이 되는 주장을 하고 있을까?
공간적, 장소적으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하는 삼위가 하늘과 땅에 분리되어 있다면 곧 모순이 되지 않는가?
지방교회는 실제로 이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자신들도 구별되는 인격을 주장하므로 정통삼위일체라고 속인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이 상반된 주장은 “경륜적삼위일체”라는 변명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즉 본질적으로는 공간적, 장소적으로 제한되는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하는데, 그러나 경륜적으로는 하늘과 땅에 계셨다는 것이다... 위 글을 읽고 지방교회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생각할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글을 읽어보자....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이들이 말하는 용어를 파악하면, 그 다음부터는 이들의 주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인 분류인 것이다.
하 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단지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다시 말하여 존재론적으로는 오직 한 인격안의 삼중적인 동시존재인데, 단지 사역적인 관점에서 보면(실제가 아니라), 하늘에도 땅에도 계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 위에서 보는 견해와 아래에서 보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 설명한 바와 같이 교회에서는 권사, 집에서는 가장, 회사에서는 사장이라는 사역이 다르다는 양태론적인 변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이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 앞서 언급했던 유니테리언주의의 두 번째 전통은 아마도 첫 번째 전통보다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훨씬 더 복잡하다. 이 두 번째 전통은 터툴리안시대 이래로 발전한 서구 혹은 라틴전통신학과 연결되어있다. 그 뿌리는 명백하게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연결되어있다. 터툴리안을 비롯한 몇몇 사람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받아들이고 고도로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경륜적 도식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였는데, 그 전제란 성부와 성자가 영원 안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성부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전제를 역사에 대한 특정한 경륜적 이해에 연결시켰다. 역사 안에서 성부 역시 자신의 역할이 있었다. 이러한 경윤주의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의 시대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르는 시기는 성자에 대한 계시의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었다...........그러나 터툴리안은 경륜주의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오해에 반대했는데 그것은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에서 알게 된 견해였다. 프락세아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라고 보기도 하지만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2-153쪽)
경륜주의는 양태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륜주의는 4세기 이후로는 한번도 정통신학이었던 적이 없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지방교회는 초대교회 교부들도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정통삼위일체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의 이종성박사의 교회사적인 삼위일체론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허위조작인가 곧 알 수 있다.
과연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사역적) 삼위일체라고 분류하는 것이 정통신학일까?
특히 지방교회와 같은 경우는 양태론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고의적인 조작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으며, 그 결과 매우 조잡스러운 논리가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지방교회는 교회사에서 그 용어만을 빌려 온 것으로, 그 개념은 전혀 다르다.
가 장 중요한 문제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본질적 삼위일체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을 때에, 경륜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내재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 분명하다.
# 경륜적인 면에서 그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그분은 한 하나님이시다......경륜적인 면에서 셋-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리 된 것처럼 보이고,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나 우리의 체험면에서 볼 때 성령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이요 하나님 자신이다.(위트니스 리, 성령70쪽)
위트니스 리는 경륜적(사역적)으로만 삼위이며, 실제로는 한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본질적으로는 삼중적이며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자신들이 삼위의 인격을 구별한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단번에 밝혀진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어느 때라도 기독교의 성부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성부하나님이 돌아가신 적이 있거나, 돌아가실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본이시며 전능하신 불사의 하나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이 돌아가셨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 주장은 양태론이며 성부고난설이다.
7. 양태론의 성경적인 모순: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성경이 서로 부딪히면, 성경의 권위를 더 인정하여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방교회는 성경보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선택한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 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존재과 동시존재를 주장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한 "내 주"는 곧 예수이시다..... 다윗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였으며 예수님이 직접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만일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다윗은 세 인격을 어떻게 구별하였을까?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장차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를 구별하여 보았는가? 신약에서 예수님은 그 문장을 유대인들에게 친히 직접 말씀하셨다.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바울은 삼신론자인가?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안에서 들려오던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복음서의 기자들은 삼신론자들인가?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스데반은 삼신론자였는가?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부어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고, 부음을 받으시는 예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으며, 붓는 성령도 삼위가 내재되어있단 말인가?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누가는 삼신론자였는가? 아니면 구위삼체론자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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